“인생 바꾼 ‘3쿠션’서 5회 우승 최다… 다음 목표는 애버리지 1.35”[M 인터뷰]
작성일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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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바꾼 ‘3쿠션’서 5회 우승 최다… 다음 목표는 애버리지 1.35”[M 인터뷰]![]() ■ M 인터뷰 - 김가영 여자프로당구 선수 고교졸업뒤 대만·美서 당구유학 세계 포켓볼 평정한 ‘작은 마녀’ 2011년 귀국뒤에도 최강 입증 2019년 ‘한국당구 발전’ 명분 ‘3쿠션’ 출전했다 자격정지 받고 30대 후반에 3쿠션 선수로 전향 LPBA 4시즌간 최고선수 활약 선수층 얇은 덕분에 우승 행운 女선수들 새 역사 만들고 있어 고양=오해원 기자 ohwwho@munhwa.com ‘작은 마녀’ 김가영(40)은 그동안 세계 최고의 포켓볼 선수로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다 한국 당구의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잠시 출전했던 3쿠션 대회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절대 최강’의 입지를 잃지 않았던 김가영에게 3쿠션이라는 새로운 도전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지만 20년 넘게 잡았던 큐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김가영은 지난달 4일 경기 고양의 소노캄고양에서 열린 ‘NH농협카드 챔피언십’ 여자프로당구(LPBA) 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김예은을 꺾고 통산 5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LPBA 출범 첫해였던 2019∼2020시즌 6차 투어 SK렌터카 챔피언십에서 처음 우승한 이후 4시즌 동안 5차례나 우승한 왕중왕. 그는 임정숙과 이미래(이상 4회)를 제치고 LPBA 최다 우승의 새로운 주인공이 됐다. 지난달 11일 대회장에서 만난 김가영은 “포켓볼 선수로서 내가 걸어온 길은 다른 엘리트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선수들처럼 나도 10대부터 두각을 보였고, 세계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며 “그러나 3쿠션은 상황이 다르다. 오랫동안 큐를 다뤘으니 어느 정도 감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30대 후반의 나이에 입문해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냉정하게 말하면 선수층이 얇은 덕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당구는 포켓볼과 캐럼, 스누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포켓볼은 당구대에 설치된 6개의 포켓에 공을 집어넣어 승패를 결정한다. 경기에 사용하는 공의 개수에 따라 에이트볼과 나인볼, 텐볼로 나뉜다. 캐럼은 포켓이 없는 당구대에서 자신의 공인 수구를 이용해 목적구를 맞히는 방식이다. 이 역시 공의 개수에 따라 3쿠션이라고 불리는 3구, 국내에서 많은 동호인이 즐기는 4구로 구분된다. 스누커는 8개 색, 22개의 공을 차례로 포켓에 넣어 승부를 낸다. 포켓볼과 캐럼은 같은 당구에 속하면서도 엄연히 성격이 다른 종목이다. 어색함이 덜할 수 있다지만 종목 변경은 김가영에게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더욱이 22년 포켓볼 인생을 뒤로하고 30대 후반에 3쿠션에 뛰어든 만큼 성공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김가영은 보란 듯 최강자로 우뚝 섰다. 3쿠션 입문 4년 만의 성과다. 김가영이 당구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유도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당구장을 운영하며 어린 딸에게 취미 삼아 당구를 가르쳤다. 운동선수 집안의 피는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성인 동호인 사이에서 기다란 큐를 들고 4구를 치던 비범한 실력을 눈여겨본 아버지는 딸이 중학생이 되자 당구선수의 길을 제안했다. 남다른 끈기와 승부근성을 확인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중1의 김가영은 1년 뒤 4구가 아닌 포켓볼 선수로 대회에 출전했다. 아버지의 당구장에 붙은 포스터 속 여자 당구선수를 목표로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았다. 김가영은 “그때는 무엇보다 미국에서 프로당구선수로 생활한다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미 국내 최강자 반열에 오른 김가영은 고교 졸업과 함께 당구 강국 대만으로 떠났다. 대학 진학과 해외 진출의 갈림길에서 김가영의 선택은 당시 남녀 당구 세계선수권자를 배출한 대만 유학이었다. 김가영은 “대만으로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두려움보다는 당구를 잘하는 이들에 대한 동경이 컸다”며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홀로서기를 할 기회였다. 그 당시 대만은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고 설명했다. 한국 돈 200만 원을 들고 떠난 대만에서의 생활은 2년이나 이어졌다.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난 대만에서 독하게 살아남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버틴다는 각오로 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벌었다. 그렇게 2년도 되지 않아 대만 당구계를 평정했다. ‘작은 마녀’ 별명은 그때 생겼다. 우리 말로 설명하자면 악바리로, 나이 어린 김가영이 독기 있게 잘한다는 극찬이었다. 평소 우상이었던 대만의 류신메이(柳信美)를 2004년과 2006년에 연거푸 꺾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연패했다. 당시 21세. 대만에서 더는 적수가 없었다. 이제 김가영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험.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미국 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대만에 처음 갔을 때도, 미국에 처음 갔을 때도 언어가 가장 문제였지만 두 나라에서의 삶은 정반대였다.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때마침 한류열풍까지 더해져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했던 대만과 달리 미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 때문에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지만 오히려 승리욕은 더 커졌다. 김가영은 “그래서 미국이 더 좋았다”며 “(무시를 당하면서도) 슬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싸워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도 랭킹 1위가 되기까지 2년 정도 걸렸다”고 이야기했다. 대만과 미국을 차례로 평정한 김가영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여자 포켓볼 프로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고는 2011년엔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최강이었지만 선수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영은 “대학에 가려고 귀국했다. 30대 후반이 되면 은퇴하고 지도자 준비를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와서도 꾸준하게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던 김가영에겐 생각 못 한 인생의 변곡점이 다시 찾아왔다. 바로 2019년 프로당구의 출범이다. 비록 종목은 달라도 당구선수로서 프로당구의 출범에 호의적이었던 김가영은 초청선수로 출전을 결심했다. 세계 무대에서 19년간 30차례가 넘는 우승을 하며 이름을 알린 당구선수인 만큼 당구라는 종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느 정도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한당구연맹은 당시 김가영에게 선수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렇게 포켓볼 선수 김가영은 어쩔 수 없이 3쿠션 선수가 되어야 했다. 입문 4년 만에 LPBA 최다 우승자가 된 김가영은 3쿠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애버리지 1.35의 벽을 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애버리지는 득점을 경기한 이닝으로 나눈 값이다. 애버리지가 높을수록 당연히 실력이 좋다는 의미다. 현재 김가영의 애버리지는 1.012. 김가영보다 높은 애버리지는 스롱 피아비(1.030·캄보디아)가 유일하다. 김가영은 “내가 우승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절대로 포켓볼 챔피언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챔피언이 됐다. 3쿠션에서도 여자 선수는 애버리지 1.35 이상을 칠 수 없다고 한다. 안 될 수도 있지만 왜 못하겠냐는 생각도 든다. 나를 포함한 LPBA 여자 선수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가영에겐 최근 여자 바둑선수 최정 9단의 선전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최정은 지난해 12월 열린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4강전에서 변상일 9단을 꺾고 여자 바둑선수 최초로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남성만의 전유물에 도달한 최초의 여자 선수다. 비록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금녀(禁女)의 땅’을 처음 밟았다는 상징성은 종목을 뛰어넘어 김가영의 도전 의지를 바짝 끌어당겼다. 김가영은 “PBA에선 50대 남자 선수들이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특별히 체력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남자 선수만의 특별한 비밀이 있는 듯하다”며 “이제는 여자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해왔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해 나갈 수 있다. 바둑의 최정 선수처럼 남자 선수들과의 기량 차이를 좁혀보겠다. 여자 선수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 “당구하며 늘 두려웠던 존재는 나 자신… 경기할때 긴장 안한 듯 ‘센 척’ 해요” ■ 최대 라이벌은 누구 세계 최고의 포켓볼 선수에서 3쿠션 선수로 변신한 김가영(40)에겐 늘 라이벌 구도가 따라다녔다. 아무리 종목이 다르다고 한들 당구대, 큐와 20년 넘게 생활했던 만큼 일거수일투족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경쟁이 익숙했던 김가영은 라이벌 구도가 낯설지 않았다. 김가영은 “라이벌 구도는 언제나 있었다”면서 “포켓볼을 할 때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라이벌을 정확하게 지목할 수 있었다. 늘 1, 2위 경쟁을 하며 함께 성장했던 만큼 특정 선수를 지목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했다. 하지만 3쿠션은 달랐다. 스스로 “나는 갑자기 뛰어든 선수”라고 하는 김가영은 “처음엔 포켓볼에서 나란히 전향한 차유람 선수가 라이벌로 지목됐다. 그러다가 이미래 선수로 바뀌었고, 다시 (스롱) 피아비 선수와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다. 유명한 선수들과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정작 나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느끼는 선수는 없다”고 말했다. 여자프로당구(LPBA) 최다 우승의 주인공 김가영은 최대 라이벌을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그는 “당구를 하며 늘 두려웠던 존재는 나 자신이었다”면서 “포켓볼은 22년을 했지만 3쿠션은 이제 4년 차일 뿐이다. 경력이 짧은 만큼 언제나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털어놨다. 김가영은 스스로 “포켓볼 선수일 때는 인터벌(경기 진행을 위해 걸리는 시간)이 없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경기하다가 실수를 하더라도 어떤 점을 수정해야 하는지 판단이 빨랐다”고 했다. 하지만 3쿠션에선 초보나 다름없는 만큼 제한시간 30초를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경기 상황에 대한 판단이 늦은 탓이다. 김가영은 “3쿠션에서는 스스로 누적된 데이터가 적어 생각지도 못한 기본적인 실수를 할지 몰라 더 불안하다. 그래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경기할 때마다 바짝 긴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 보이기 위해 항상 센 척을 하고 있다”고 활짝 웃었다. 출처 : https://n.news.naver.com/sports/general/article/021/0002554641?lfrom=kaka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