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볼 ‘뜨는 별’ 권보미,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풀 서바이벌 1차 대회 3위
-“일대일 경기가 아닌 네 명이 서바이벌 방식으로 경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공이 점수로 이어질 때의 느낌과 소리가 당구장으로 향하게 했어요”
-“2020년 2월부터 5월까진 기량 향상 꾀하기 위해 타이완에 다녀왔어요”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 참여하면서 팬이 생겼어요”
[엠스플뉴스]
권보미는 학창 시절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나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체육 성적이 늘 좋았다. 권보미는 “막연하게 예체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권보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큐대를 잡았다. 딸의 운동신경을 눈여겨본 아버지의 권유였다. 취미로 해보라는 말이 평생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권보미는 포켓볼 시작 1년 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우승과 인연이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첫 우승까지 7년이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 첫 우승을 일군 후엔 코로나19가 계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권보미는 2020년 2월부터 5월까지 포켓볼 세계 최강국으로 평가받는 타이완에서 기량 향상을 꾀했다. 한국에서 예정된 전국대회 참가를 위해 일찍이 타이완 생활을 마쳤지만 대회는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취소된 것.
권보미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풀 서바이벌 1차 결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승에 진출한 권보미는 3위로 첫 대회를 마쳤다. 권보미는 “낯선 룰에 적응한 만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응원하는 팬들이 생긴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엠스플뉴스가 권보미를 만났다.
- “공이 점수로 이어질 때의 느낌과 소리가 당구장으로 향하게 했어요” -
1월 3일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풀 서바이벌 1차 결승에서 3위를 기록했습니다.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첫 포켓볼 대회였어요. 우승을 목표로 온 힘을 다했죠. 우승 트로피를 들진 못했지만 재밌게 경기했어요. 또 포켓볼 대회가 남았어요. 낯선 룰에 적응한 만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낯선 룰이요?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방식으로 경기한 건 풀 서바이벌 1차 대회가 처음이었어요. 연습할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죠. 보통 포켓볼은 일대일 경기예요.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선 네 명이 서바이벌 룰로 경기를 치르죠. 집중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아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힘쓰고 있죠.
포켓볼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아버지께서 당구를 아주 좋아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는 “당구가 10년 후엔 크게 성장할 것 같다”며 “취미로 한 번 해보라”고 했죠. 포켓볼아케데미에서 처음 큐대를 잡았어요. 그때가 2011년이었죠.
처음 큐대를 잡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합니까.
공이 포켓으로 빨려 들어갈 때의 느낌, 소리가 아주 좋았어요. 큐대에 초크칠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 느낌도 아주 좋았죠.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심장을 뛰게 했어요(웃음). 포켓볼을 하면 할수록 깊이 빠져들었어요. 1년 후 선수등록을 했죠.
2012년에 선수등록을 한 거군요.
주변 선수들과 비교해 늦은 편입니다. 보통 선수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요.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큐대를 잡았죠.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하나였어요. 연습이었죠. 반복 훈련에 집중하면서 실력이 조금씩 좋아진 것 같아요. 20살 이후엔 전국대회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감이 붙었죠.
2019년 풀투어 2차 대회 여자부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습니다.
우승까지 아주 오래 걸렸어요. 전 노력파라고 생각해요. 재능이 특출나지 않은 까닭에 남들보다 1분이라도 더 연습해야 경쟁력을 보일 수 있죠. 그래서 최소 8시간 이상은 꾸준히 훈련했는데 성과가 없었어요. 2019년엔 슬럼프까지 찾아왔습니다. 포켓볼을 그만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죠. 그런 시기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거예요.
아.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 울컥했어요. 포켓볼을 시작한 순간부터 첫 전국대회 우승까지 하나둘 떠올랐죠.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어요. 특히나 제 또래 선수들은 우승 경력이 있었습니다. 저만 없었어요. ‘나도 빨리 우승하고 싶다’는 촉박함에 경기를 그르친 적이 있었죠.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웃음).
많은 선수가 “첫 우승이 어렵다. 한 번 우승하면 성장 속도는 더 빨라진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한 번 더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게 사실이에요. 슬럼프에서도 벗어났죠(웃음). 다른 건 똑같아요. ‘남들보다 1분이라도 더 연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한 가지 아쉬운 건 한 단계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로나19가 찾아왔다는 거예요. 2020년 정상적인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어요. 타이완에서 특별훈련까지 하고 왔는데...
- “2020년 기량 향상 꾀하기 위해서 타이완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
타이완 유학은 어떻게 다녀왔습니까.
타이완, 중국이 포켓볼 세계 1, 2위를 다툽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많죠. 타이완에서 연습하며 한 단계 성장하고 싶었어요. 타이완에서 2020년 2월부터 5월까지 훈련했습니다. 다른 것보다 타이완에선 최고 인기 종목이 포켓볼이란 게 아주 부러웠어요. 동네 당구장엔 포켓볼 테이블 뿐이에요. 당구장을 모든 손님이 포켓볼을 즐기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포켓볼의 매력은 뭡니까.
저도 궁금해요(웃음). 처음 시작했을 때 공이 포켓을 통과할 때의 희열. 처음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들이 지금까지 포켓볼과 인연을 이어가게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역전승’했을 때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요.
타이완에서 배운 건 무엇입니까.
스트로크를 조금이나마 바꿔보려고 했어요. 단기간이어서 크게 바꾸는 건 어렵지만 반복해서 연습했죠. 타이완 코치님이 “힘을 빼야 한다”며 “이 부분만 고치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했어요. 동시에 세계 최고 선수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배워봤고요.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난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애초 계획은 6개월 이상 머무는 거였는데...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5월 한국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었어요. 타이완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대회가 취소된 거예요. 짧은 시간이지만 배운 기술들을 활용하고 싶었는데 허무했어요. 이후에도 대회가 하나둘 취소되면서 말 그대로 감각 유지만 하는 상황이 지속됐죠. 훈련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2020년엔 대회 출전이 없었던 겁니까.
3개 대회에 출전했어요. 2019년엔 한 달에 한 번씩은 대회에 나갔어요. 국외 대회에도 출전했죠.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 3쿠션뿐 아니라 포켓볼 종목이 있어서 아주 감사해요. 선수들이 경기할 기회를 얻고,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거든요.
아주 좋은 기회요?
포켓볼 선수들은 이름을 알릴 기회가 흔치 않아요. 그래서인지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에서 만난 선수들은 경기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방송 경기는 처음인 까닭에 긴장되지만 큰 경험으로 생각하고요. 신기하기도 하고요(웃음).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이야기했거든요.
이야기했다?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꼭 챙겨봐 달라고요(웃음). 이번 대회로 새롭게 경험한 건 또 있어요.
어떤?
경기 후에 응원하는 팬이 생겼다는 거예요(웃음).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많은 분이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어요. 깜짝 놀랄 정도죠. 중계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어요. 더 잘해야 한다는 각오도 다졌고요. 2차 대회에선 꼭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서 응원해주는 분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요(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rots@mbcplus.com